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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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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입니다. 제목과 포스터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발레 음악인 백조의 호수, 그리고 동명의 발레 작품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본 영화의 플롯은 극 백조의 호수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갈망과 빼앗김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에 카메라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장르적으로는 스릴러, 공포적인 연출을 잘 따르고 있으며, 미장센 활용이 특히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오프닝 장면은 한줄기 하얀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춤을 추고 있는 한 발레리나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주인공은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 扮)입니다. 완전한 암흑의 공간에서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발레리나의 모습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작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오딜 역은 한 사람이 1인 2역으로 소화해야 하는 역할인데, 그 명칭이 각각 백조와 흑조입니다.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니나에게 명과 암을 동시에 입힌 시각적 연출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니나에게 시각적 잔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백조 여왕은 백조와 흑조를 한 몸에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배역을 니나가 따게 될 것임을 관객은 자연스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프닝 시퀸스는 단순히 니나의 배역 결정을 암시하는 것을 넘어 공주가 왕자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마법사에게 붙들려 결국 저주를 풀지 못해 백조가 되고 마는 장면을 짧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었는지를 간단히 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백조의 호수를 재구성하고 있으면서도 놀라울 만큼 그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공주가 완전한 백조가 되어 저주가 온전히 실행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감독은 사람이 새로 변하는 이 순간을 영화 내내 십분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며 니나가 저주에 침식당하고 있는 정도를, 완전히 가라앉고 마는 순간을 인간이 새로 변하는 시각적인 연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출이 그로테스크하거나, 공포스럽고 기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감각적 불편함에 관객이 시달리는 만큼 관객은 주인공의 결말에 더욱 깊은 애도와 슬픔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어릴 적 동화책에서 간단하게 넘어갔던 "진정한 사랑"과 "영원한 저주"의 중압감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재감상하여 다시 오프닝 장면을 본다면 주인공의 시련과 결말을 이 짧은 장면에 모두 함축하고 있었음에 다시 놀라게 될지도요.
니나의 캐릭터성을 부각시키는 방법 또한 좋았습니다. 하나의 방법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어머니(바버라 허시 扮)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니나가 어머니와 부엌에서 대화를 나누는 시퀸스에서, 살갑게 대화하다가 니나의 등에 생긴 상처를 보고 어머니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짧은 장면 속에 등에 생긴 상처가 이번이 처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마찰이 과거부터 여러 차레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굳어진 어머니에게 항변하는 니나의 모습은 어머니가 강압적인 사람이라는 인식을 줍니다. 이러한 인물 사이의 위계질서는 이후 니나가 백조 여왕 역으로 확정된 후 집에 돌아온 케이크 씬에서 다시 강조되고, 중반부에 있는 니나가 릴리와 밖으로 나가기 전 시퀸스, 그리고 나갔다가 돌아온 시퀸스에서 변주되며 후반부의 공연 직전 집에서의 시퀸스에서 힘의 관계가 역전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릴리가 집에 찾아오기 전 씬에서 있는 어머니와의 대화의 한 장면입니다(56:00).
위 씬에서 어머니는 니나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부를 묻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발레리나로서의 경력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우려 또한 있음을 대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니나에게 강압적이고 집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당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장면이 니나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이빨을 내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둘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있을 것임을 이 쇼트가 보여주고 있는데, 실제 인물들은 서로를 향해 앉아 있지만 거울 속 인물들은 자리가 뒤바뀐 채 서로 돌아앉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화 내용에서도 마찬가지, 어머니의 니나를 향한 걱정과 충고의 말은 그녀의 진심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 니나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려는 찰나에 릴리가 벨을 울리며 대화가 단절됩니다. 계속 앉아 있었던 니나가 일어나서 어머니를 지나쳐 나가는 것은, 이 순간부터 둘 사이의 힘 관계가 뒤바뀔 것임을 공간적 관계를 활용하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발레리나로 성공하겠다는 니나의 강한 집념과 집착은 감독과 베스와의 관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스는 오랫동안 무대 위에 선 유명 발레리나로 감독인 토마스의 페르소나 격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베스와 감독 사이에 성적인 커넥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로 발레리나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죠. 이런 베스와 감독에게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니나입니다. 이는 발레리나로 성공해서 완전해지고자 하는 니나의 강한 욕구가 반영된 것입니다. 니나가 베스의 물건을 하나씩 가져가는 것도 동일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스를 동경하고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는, 어쩌면 그 자리를 빼앗고 싶어하는 욕망이 베스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니나의 이러한 욕망은 순수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그려지지 않고 다분히 목적지향적이고 추악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니나가 가장 먼저 가져간 베스의 소품은 립스틱인데, 니나가 배역을 릴리에게 빼앗길 것 같아 걱정하여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간청하러 갔을 때 정황상 이 립스틱을 바르고 감독에게 간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 토마스는 베스에게 뻗쳤던 성적 욕망의 손아귀를 니나에게도 드리우는데, 앞선 장면들에서 나오는 니나의 어두운 욕망이 이 장면에서 니나를 단순한 성적 피해자로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남의 것을 훔쳐 내어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 니나의 선택은 그녀 자신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배역을 확정받은 니나는 화장실칸막이에서 어머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는데, 그 후 밖으로 나와 화장실 거울에 립스틱으로 쓰인 "WHORE"라는 글씨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치부를 안 다른 발레리나의 소행인 것처럼 보이나, 자책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니나의 심상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니나에게 보이는 환각과 환시가 점차 확대되므로 립스틱으로 쓰인 비난 또한 그녀 스스로 만들어 낸 자책이 환시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백조 여왕이라는 배역을 가지고 니나와 릴리(밀라 쿠니스 扮) 두 발레리나는 경쟁하는 사이입니다. 관객은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간단히 원작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공주 오데트와 마법사의 딸 오딜을 연상합니다. 당연히 니나에게서는 오데트를, 릴리에게서는 오딜을 떠올릴 것입니다. 캐릭터의 성격으로 보자면 니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그녀의 발레는 완전하지만 경직되어 있다는 특징을, 릴리는 한결같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발레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비가 됩니다. 색체에서도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니나가 릴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시퀸스에서 니나는 밝은 옷, 릴리는 어두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색의 대비는 순결하고 일편단심의 백조, 매혹적이고 위험한 흑조의 심상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릴리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니나에게 검은 란제리를 건네는 것은 이러한 색체 대비의 맥락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나가 화장실에서 흰색 속옷 위에 검은 란제리를 입는 것이 마치 백조에 검은 물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약에 대한 거부 의사가 분명히 있었던 니나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약에 취해 광란의 밤에 휩쓸리는 것은 관객에게 안타까움과 더불어 강한 불쾌감과 불안함을 선사합니다. 불안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강렬한 조명과 일렉트로닉 음악을 사용하였고, 빠르고 긴박한 편집을 활용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쾌감이 극대화되는 것은 두 사람이 니나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녀의 방의 침대에서 정신분열적인 밤을 보내는 씬입니다. 니나의 방은 분홍색 일색의 방인데, 집의 다른 공간과 다른 독보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는 공간입니다. 장식을 보면 인형, 오르골, 기타 여러 장식과 기구에서 발레의 자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방의 분위기를 눈치채자마자 관객은 그 방을 누르고 있는 왜곡된 훈육의 압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니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바로 그 방에서 니나가 일탈된 행동을 벌이는 것은 그동안 자신을 누르고 있던 압력의 폭발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사나운 비수로 찔리는 듯한 극도의 불쾌감을 줍니다. 자, 이제 니나는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리허설에 늦고 만 니나는 서둘러 연습실로 향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대역으로 있는 릴리를 목격하게 됩니다. 한술 더 떠, 어제의 기억의 일부분은 자신의 환각이 만들어 낸 것이며 릴리는 애초에 자신의 집에 들어온 적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하려 하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힘들게 따낸 백조 여왕의 배역, 지금까지의 피나는 노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보는 공포에 아무거라도 속죄하고 후회하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릴리의 어깻죽지에는 날개 문신이 있습니다. 반면 니나에게는 환각으로 빚어 낸 진짜 날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날개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나, 원작 백조의 호수의 결말을 생각한다면 날개는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여기서 날개는 인간이 새로 격하되는 저주의 실행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릴리에게는 백조가 되는 저주가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등에 있는 것은 진짜 날개가 아닌 그림에 불과하며, 저주를 흉내 낸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마치 오데트의 모습을 흉내 내 왕자를 속이고 결국 오데트를 파멸에 이르게 한 오딜과 같이, 흉내 낸 날개를 단 릴리는 니나가 최후의 파멸에 이르는 것에 일조합니다. 반면 니나는 심상상태의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를 환각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재치있고 탁월하게 풀이하였으며, 동시에 불편하고 징그러운 이미지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감독의 훌륭한 역량이라고 생각됩니다. 니나의 날개는 처음에는 긁는 습관, 상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등에 무언가 있어 이것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흡사 플라이(1986)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상처를 긁어내는 것은 돋아나는 날개를 뽑아내고 싶은 것이며,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몸부림입니다. 이는 상처에서 난 피를 필사적으로 닦아내는 장면, 그리고 손에 생긴 상처에 대한 태도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오데트가 백조가 되고 싶지 않아 저주에 저항하였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마지막 장면일 것입니다. 환각과 망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에서 거침없이 연주되는 마지막 공연이 시작됩니다. 이 시퀸스의 시작은 니나가 자신의 집에서 공연장까지 오는 장면의 간결한 쇼트편집입니다. 인물의 등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가는 동일한 구도를 유지하면서 배경만 변하게 편집하였기 때문에 공간 사이의 이동이 함축되어 속도감 있게 편집되었습니다. 덕분에 앞선 장면의 니나와 어머니의 다툼으로 비롯된 불안정적인 에너지가 그대로 응축되어 공연장까지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짧은 이동장면의 삽입은 니나가 공연장으로 급히 이동하였음을 보여주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만약 이런 편집을 쓰지 않고 공간이 곧바로 집에서 공연장으로 바뀌었다면 두 공간이 단절되어 감정적인 에너지가 분산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편집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장 큰 반전에 해당하는 부분은 니나의 릴리 살해 씬일 것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 가장 알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일 텐데요. 니나와 릴리가 두 사람만 있는 이 환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앞서 나타난 니나의 방에서 있었던 환각과도 동일시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선 니나의 방에서 본 환각에서도 릴리의 얼굴이 니나 본인의 얼굴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었고, 백조 여왕의 대기실에서 벌어지는 이 씬에도 같은 환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상대방에게 투영되는 환각, 그리고 자신의 신체가 자신 이외에게 조종당하는 듯 한 망상은 현실의 밀도를 가지고 나타나 니나에게 자기파괴적, 자기분열적 공격의 피날레를 퍼붓습니다. 자기파괴적 행동은 릴리를 거울에 밀어붙여 거울조각으로 깊숙히 찌르는 장면에서 극대화되며, 이는 그 자체가 환각이었고 사실 찔린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완성되었습니다. 광기에 물들어 무대로 나온 니나는 원작에 있는 푸에테 32턴 장면을 소화하고 관객에게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그리고 릴리가 손끝하나 다치지 않았고 자신이 찔렸음을 확인한 뒤에 오른 무대에서 니나는 그야말로 상실감의 극한을 보여주는 무대를 선보였고, 상심과 후회를 뒤로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립니다. 이때 무대의 마지막은 영화 인트로에 등장했었던 씬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은 클로즈업과 핸드헬드카메라, 그리고 적절히 사용된 음악으로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특히 발레 장면을 핸드헬드카메라로 따라가면서 촬영한 덕분에 전후에서 느끼고 있는 감정선이 그대로 무대 위까지 올라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위 영화가 받는 여러가지 호평들처럼 배우의 연기가 정말 훌륭했던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배우의 역량이 아니라, 연기력을 끌어올리는 연출이 대단했습니다. 나탈리 포트만의 조곤조곤한 어조가 등장할 때마다 긴장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불안했습니다. 감독의 괴상한 연출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들어가 관객의 감정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온전히 가져가 쏟아내었습니다. 재밌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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