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리뷰] 콘크리트 유토피아(Concrete Utopia, 2023)

무비루비 2023. 10. 21. 20:41

 

 

(본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시도하는 신선한 재난영화였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찍어낸 재난영화에 익숙하시다면 재난영화가 주로 포커스하는 피사체는 재난을 이겨내는 영웅적인 인간상이라는 제 의견에 동의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난상황은 일상생활에 닥치는 강한 외력의 개입입니다. 공동체에 어떠한 강한 시련이 찾아오면, 그 공동체 내부에 존재해왔던 갈등과 시련이 한순간에 별 것 아닌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극한 상황에 닥쳤을때야말로 전혀 단합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표가 한 곳으로 모이고, 이는 시련을 극복해낼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 한민족이 역사적, 시대적 시련에 빠졌을 때 어떻게 극복하여 왔나요? 우리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시련을 극복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물론 맞지만, 시대를 구한 구국의 영웅의 존재를 우린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한데로 모이는 것은 자연 법칙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의 깃발 아래 대중의 의지가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말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시련을 극복할 힘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극한의 재난상황을 다루는 재난영화의 흐름 또한 이러한 영웅적인 인간상을 조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할리우드 영화의 어떤 정서라고도 생각됩니다. 한국 영화가 슬픔의 감정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장치를 많이 사용하는데(과하지만 않으면 너무 좋은 연출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파는 항상 감정이 너무 앞서나가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관객을 설득하면서 울려야 합니다. 많이 울릴 궁리만 하지 말고.) 영웅주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만큼이나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웅주의적 해석이 흔하다고 해서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웅주의는 인간이 시련을 딛고 일어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어 이번같은 팬데믹 사태에 자비로 고아원에 지원물품을 보내는 사람, 혹은 화재 현장에서 용감하게 뛰어드는 소방관의 모습 등을 보며 사람들은 안좋은 상황 속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재난영화와 영웅주의가 만났을 때 정말 좋은 시너지를 내게 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런 일반적인 재난영화의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먼저 재난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재난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 <2012>, <코어>, <볼케이노>, <투모로우>... 등등 재난영화는 재해의 컨셉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합니다. 재난영화에서는 -재앙과 참사를 다루는 그 자체, 웅장하고 심지어 무력감까지 느끼게 하는 컴퓨터 그래픽이 세일즈 포인트라서- 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재난 그 자체에도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영웅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재난은 결국에는 영웅의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 뛰어넘거나 견디어내야 하는 장애물입니다. 무시무시한 재난상황이지만 역설적으로 두려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해의 윤곽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적이 막강해보이는데 잘 알지도 모르겠다면 얼마나 무력할까요. 무지에서 오는 공포는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참사를 다루는 방식이 바로 이러합니다. 인트로에서 서울에 아파트가 지어지고 점차 발전하는 과거 영상자료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아파트는 주거공간으로써 울타리,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증유의 지진으로 아파트는 물론이고 주위의 모든 건물이 힘없이 쓸려나갑니다. 끔찍한 참사가 지나가고, 보호의 수단 없이 사람들은 극한의 이상저온에 그대로 노출되게 됩니다. 영화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건물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짧습니다. 영화 <산 안드레아스>와 비교하면 정말 극과 극인 것 같네요. 대신 건물이 다 무너져내린 후의 모습은 롱 샷으로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와 대비되게 말입니다.  재난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피해상황에 더 집중하게 되니 참사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관객이 더 이입할 수 있고 더 공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황궁 아파트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주민회의 씬에서 -이제 우리 아파트가 제일 비싸진 거 아닌가?- 라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황궁 아파트는 이름과는 달리 원래는 그냥 평범한 아파트였습니다. 다른 아파트와 태생부터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 아파트같은 것이 아니었죠. 그런데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아파트가 되었습니다. 황궁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는지의 여부가 마치 생사여탈권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민성(박서준 扮)과 민성의 아내 명화(박보영 扮)는 황궁 아파트의 주민입니다. 재난 초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생활에 필수적인 기본 시설이 전부 파괴되었으니 당장 먹을 음식, 몸을 씻을 물, 불을 밝힐 전기가 부족합니다. 냉장고를 보면 당장 일주일 후가 걱정되는 상태입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도 곤란한 상황에 빠졌지만, 혼란 속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외부인들은 더욱 가혹한 입장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주민 일부에게서 불쌍함과 연민의 시선을 적선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사람만이 집 한구석에 엎드려 웅크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외부자의 존재는 아파트 주민에게 있어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외부인을 불쌍히 여겨 집에 숨겨 준 주민은 처음부터 일부에 불과했고, 자원의 부족함이 점차 실감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결국 주민들은 영탁(이병헌 扮)을 대표로 앞세워 눈에 보이는 외부자들을 싸그리 밖으로 쫓아내버립니다. 이 과정을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이 장면은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외부인들을 불쌍한 눈으로, 아파트 주민들을 도덕성의 잣대를 대어 바라보게끔 유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파트 주민은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황궁 아파트라는 이름이 상황을 역설적으로 묘사하는 효과도 있지만 이 아파트가 값싸보이게 만드는 효과도 있습니다. 만약 주민들이 고급, 프리미엄 아파트의 주민으로 설정되었다면 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금 계급을 만들어내고 차별적으로 타인을 배척하는 장면에 더욱 강조를 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이 평범한 소시민이었다는 사실은 관객이 가벼운 마음으로 주민들을 비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는 외부인을 밖으로 내쫓는 무자비한 모습의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에게 나 자신을 투영해 보길 바라는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객들은 어느새, '그래도 내가 살려면 어쩔수 없어. 나라도 저렇게 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면 우리는 그것을 나쁘다고 합니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원죄에는 해당되지 않는 주장인지도 모르겠으나, 죄는 규칙이 있기에 성립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규칙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죄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법은 눈에 보이고 직접 만질 수도 있는 명시적으로 정해진 사회의 규칙입니다. 한편으로, 법제화가 되지 않은 규칙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인이 넘어지려고 하면 옆에서 부축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또 경험상 많은 사람들이 지키는 규칙입니다. 이와 같은 규칙은 법제화되지 않았음에도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이러한 것을 법과 구분하여 사회적 규범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규범은 어릴 때부터 사회화를 통해 교육받는 개념입니다. 법을 동심원이라고 하면 규범은 법을 포괄하고 있는 더 큰 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한 개개인의 양심은 규범이라는 원을 최대한 포함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이러한 양심의 범위의 조정이 사회화 과정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양심의 원이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이것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은연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람의 생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사람은 그 행동이 나의 가치관과 충동하는 것을 강한 고통으로 인식합니다. 작심삼일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에게만 있는 결핍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생각의 회로입니다. 내가 정해둔 경로에서 벗어날 때, 방향을 바로잡는 것보다 정해둔 경로를 수정하는 것이 언제나 쉽습니다. 양심의 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규범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며 분노에 휩싸이기 십상인데, 사실은 우리 몸의 방어기제에 해당합니다. 악행을 저지른 나와 나의 가치관이 강하게 충돌하는 것이 너무나도 큰 고통이기 때문에, 본인의 가치관을 조금 수정해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메스컴에 등장하는 범죄자처럼 너무도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법칙일까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저의 생각은 '맞다'입니다. 어떤 흉악범이라도 그가 저지른 범죄의 개념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후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사회의 규범이라는 커다란 원을 충분히 포괄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가치관의 수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끝에 다른 사람과 어울려 생활하기에는 너무도 괴리된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런 사람들이 날 때부터 나쁜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영탁의 관점에서, 또는 다른 아파트 주민의 시선에서 영화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악행에 단순히 일차원적인 이해로만 공감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당위가 영탁이 내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타락하게 된 유일한 이유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영탁의 가치관 그 자체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서서히 변화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파트 주민들을 나쁘게만 볼 수 없습니다. 비판적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원래 나쁜 것이 아니니까요. 

 

아파트 주민들이 끝내는 타락하고 악인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영화의 끝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타락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환경이다 - 라는 수동적인 해석은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민성이라는 캐릭터는 극한 환경에 내몰려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되지만 결국 본래의 도덕적 가치를 수복하는 인물입니다. 명화는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는 인물입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감독의 의도입니다. 의지는 원시적 본능을 이길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사랑하는 민성을 잃은 명화가 도달한 곳은 가치관의 변화를 덜 겪은, 즉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는 우리가 왜 책과 사람을 가까이 하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더욱 외골수로 빠져들어 가치관의 왜곡이 발생하기 쉽지만, 이것은 좁고 깊은 공동체에 갇혀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궁아파트는 민성과 명화에게는 마치 우물 안과 같은 제한적인 공간이었지요. 그래서 아파트 바깥에도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이렇게 건전한 가치관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와 같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스스로 추구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관을 지향하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자유롭게 확장될수록 더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