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리뷰] 화란(hopeless, 2023)

무비루비 2023. 10. 12. 22:13

기회가 있어 운좋게 영화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추석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날씨가 선선해지는데, 영화관에는 마침 또 사람이 별로 없는 날이었습니다. 아마도 평일 저녁이라 그랬겠지마는 요 근래 영화관에 걸린 영화들이 화제성이 부족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으레 영화를 깊이있게 즐긴다고 착각하고 으스대는 저와 같은 입문자들은, 영화관이 한산하면은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고양되는것 같습니다. 마치 남몰래 혼자 재미보는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ㅎㅎ 암튼 그렇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화란은 네덜란드를 음차한 것입니다. 중세의 홀란트(houtland)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중세경제를 말할 때, 방앗간은 곡물의 가공에 필수적인 시설이었기에 꼭 설명하고 넘어가는 주제입니다. 방앗간을 사람이나 동물의 힘으로 돌리기도 했지만 기술이 발달하며 수력을 이용한 물레방아식이 인기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은 강이 얼어붙어도 곡식을 빻을 수 있게끔 풍력을 이용하는 식으로 발달하였습니다. 그때의 홀란트의 풍차는 지금까지도 네덜란드를 뜻하는 심볼이 되었습니다. 다른하나는 튤립이지요. 풍차와 튤립은 미지와 동경의 장소인 화란의 표상으로 작품 속에서 등장합니다. 한편으로 화란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재앙과 난리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화란이 둘 중 어떤 의미를 표상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양쪽 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은 미지에의 동경과 희망을 좇으며 살아가지만, 나아가는 길의 종착지는 끝내 파란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연을 맡아주신 배우는 홍사빈(김연규 易), 송중기(치건 易) 배우분입니다. 영화 화란은 배우 송중기씨가 대본만 보고 개런티 없이 출연한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기도 합니다. 배우 입장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영화에 참여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할 정도면 시나리오가 얼마나 재미있어야 할까요? 그것도 송중기 배우가 그랬다니. 시나리오가 어땠을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외에도 연기에 자신있는 배우분들이 대거 참여하셨습니다. 

 

영화관에서 아쉬운 점은 역시나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 약간씩 놓쳤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예전 영화들을 보면 대사가 또렷이 잘 들리는데, 대사를 똑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보니 자막이 있었다면 싶더라고요. 과거 80년대 영화들을 예시로 들어 보면 연극풍의 대사와 몸짓 처리가 많았다보니 말의 톤이 확실하고 행동연기도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카메라가 담을 수 있는 정보의 밀도가 증가하니 말투의 사소한 톤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마저 스크린에 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감독님께서 표정의 섬세한 연출을 과감하게 사용하셔서 서사의 밀도가 높았습니다. 다만 자막이 있으면 대사를 다 이해할 수 있어 더 좋을 것이란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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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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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고등학생인 연규(홍사빈 扮)가 한 학생을 돌로 찍어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돌로 내려치려고 다가오는 연규는 혼자입니다. 반면에 맞게 되는 학생은 다른 패거리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습니다. 그래서 연규는 비록 가해자로 처음 등장하지만 등장하자마자 우리는 연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연규는 지켜줄 사람 없이 혼자서 운동장이라는 사회에 내몰려 있고 주위에는 그런 연규에게 적대적인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규는 그러한 세상에 폭력으로 맞서고 있음을 인트로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규가 불량학생과 마찰을 빚게 된 이유는 아버지 다른 동생인 김하얀(김형서 扮)을 그 학생들이 해코지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름처럼 하얀이는 연규가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게 하는 마지막 동아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영화 전반부에 짙게 깔리는 것은 연규의 아버지에 대한 공포입니다. 연규의 가족은 이미 울타리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불량학생에게 자기방어의 의미에서 휘두른 폭력은 아버지를 통해 더욱 배가 되어 연규에게 돌아옵니다. 폭력의 사슬에는 연규 자신도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명 악행을 시작한것은 그가 아니었지만, 연규에게 돌아오는 무자비한 폭력은 냉정하게도 인과응보의 모습마저 보이는 듯 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또한 있었다고 보입니다. 영화 중반부에 연규가 치건(송중기 扮)에게 본인의 가정상황에 대해 하소연하는 장면에서 이를 엿볼 수 있는데,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던 기억을 토로하며 연규가 눈물을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맞는 아픔과 공포에 무뎌져, 연규는 따가운 현실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지만, 벗아나려고 하는 의지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연민하는 어머니에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서 말이죠.

 

영규를 한발짝 움직이게 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요, 현실에 떠밀린 것입니다. 영규는 무력감에 짓눌려 마지막 양심마저 저버리고 치건이 중간 보스로 있는 폭력 집단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 선택은 영규를 화란(和蘭)으로 갈수 없게, 그리고 화란(禍亂)으로 치닫게끔 하는 갈림길과 같은 사건입니다. 영규가 치건에게 화란에 대해 꿈꾸듯 말하며 던지는 대사가 있습니다. '화란에서는 누구나 다 같다'라고 합니다. 치건은 '그런 곳이 있으면 내가 벌써 갔지'라고 합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하얀이가 '왜 ㅅㅂ 우리 오빠한테만 이ㅈㄹ인데' 라며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는 영규가 스스로 느껴왔을 불합리한 현실을 원색적으로 표현한 대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규가 폭력집단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제는 본인이 불합리한 폭력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할망정, 본인이 고리를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영규는 '누구나 다 같은' 화란에 가장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불쌍한 것은 영규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기질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조별과제를 할 때에도 망해가는 그룹을 혼자 견인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영규가 양심을 버리고 악행의 구덩이로 빠지게 되자 아버지는 가정을 견인할 책임을 다시 떠안게 됩니다. 그래서 영규가 폭력집단게 가담하기 이전에는 아버지를 공포의 심볼로 사용하지만 이후로는 술에 취하지 않은, 힘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더 조명합니다. 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영규의 운명, 그리고 가족의 운명은 정해진 후입니다.

 

치건의 사업장의 방식은 악랄한 고리대금업입니다. 작은 소도시에 소상공인들에게 오토바이는 곧 생활수단입니다. 과거로 따지자면 밭갈이 소 같은 느낌이지요. 그런 오토바이를 밤에 몰래 작업해서 절도를 행하고, 외관을 완전히 새로 하여 팔아넘깁니다. 소를 도둑맞은 소시민들은 다시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으니, 결국에는 고리대금의 고객이 되는 구조입니다. 작중 치건이 송곳을 들고 다니면서 오토바이를 쑤시는 장면이 지겹도록 등장합니다. 절도한 오토바이는 모든 것이 상품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치건의 송곳은 상품성이 없는 오토바이를 배제하는 감정없는 도구이고 수단입니다. 대표적으로 완구(홍서백 扮)의 오토바이가 그러합니다. 오토바이에 구멍을 내는 것은 꼭 소를 도축하는 것만 같습니다. 치건의 송곳은 무기질적이고 감정이 없지만, 스크린에서는 무자비한 행동처럼 그려집니다. 그도 그럴듯이, 이는 누군가의 생업이었기 때문이겠죠. 영규가 완구에게 뿌리내린 폭행의 사슬은 돌고돌아 영규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영규에게 또다시 불합리한 폭력을 선사합니다. 치건은 자신과 비슷한 환경, 비슷한 기로에 서 있는 영규를 받아주었다가 이제 쫓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치건과 영규는 같은 환경에서 자라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서사적으로 이 둘의 차이점은 시간선밖에 없습니다. 마치 함수처럼, 이대로 다른 인풋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치건과 영규는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치건이 영규를 쫓는 순간이 오자, 치건은 갈등에 빠지게 되고 결국 조직의 질서를 어지럽히면서까지 영규를 돕습니다. 이 순간이 치건에게 있어 분기점입니다. 과거 치건은 연못에 빠진 것을 기점으로 인간성을 죽였고, 악행의 고리의 부품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영규를 구하기 위해 치건은 조직을 적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규는 하얀과 함께 치건을 찾아옵니다. 영규는 하얀을 담보로 자신에게 유예기간을 요구하는데, 이때 하얀을 담보로 맡기는 것은 영규의 과거 화란으로 가고싶어 했던 가치관과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하얀은 영규의 꿈, 양심을 표상하기 때문이죠. 그 이후 장면에서 오토바이가 앵꼬나서 사거리에 멈춰서는 영규가 있습니다. 다시금 분기점에 온 영규는 다시 절도를 선택하지만 그순간 스스로의 추한 모습을 봅니다. 다시 치건을 찾아가서 하얀을 구하고 손톱을 뽑아내는 영규의 모습은 이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같았습니다. 앞선 치건의 손톱을 뽑는 장면이 영규를 옭아매려 한 것과는 반대였죠. 두 사람의 몸싸움 끝에 영규가 치건에게 송곳을 들이댑니다. 치건이 오토바이를 송곳으로 쑤시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인과응보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작중에는 영규와 치건 뿐 아니라 치건의 선배격에 해당하는 국회의원후보직으로 나오는 인물이 있습니다. 치건이 영규의 미래라면 선배는 치건의 미래입니다. 그 또한 이 마을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치건은 본인의 최후의 순간에서 죽음만이 자신의 고리와 운명에서 벗어날 수단임을 깨닫게 됩니다. 격하게 싸우던 두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마치 치건의 자결과 같은 형태로 마무리하게 되죠.

 

일이 마무리되고 영규는 하얀과 함께 마을을 빠져나옵니다. 마을의 경계를 보여주는 표지판이 보이고 우울한 햇빛이 두 사람의 도망을 비추어줍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영규가 타고 있는 것 또한 오토바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며 오토바이의 표지판에 있는 지명을 보여줍니다. 영규는 본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형을 잃어버리고 이제 도망하지만 마을의 악행과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생각에 영규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본 영화는 주인공의 이상과 그 이상에서 동떨어진 현실, 그리고 주인공이 철저히 현실에 의해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올해 본 거 중에 가장 불쌍한 영화 시나리오가 아니었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