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리뷰] 밀양(Secret Sunshine, 2007)

무비루비 2024. 6. 9. 18:43

 

 

 

 

 

*****스포일러 주의*****

 

 

 

 

오늘 우리는 감정보다는 이성, 신비보다는 합리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치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감정을 과하게 뒤흔드는 것은 대중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천하게 여기려 하는 태도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서로 대등한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란, 인간의 정신이 외부 세계로부터 자극을 받을 때 보이는 반응의 총체입니다.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아가 외부와 연결되기 위한 다리이자 창문이고, 자아가 그로 인해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며 반대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한편 이성은 감정을 감독하는 감독관입니다.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작동하는 이성은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감정적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의 합리적 도피처로 전락해 버렸고, 이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감정적 응어리는 가려졌을 뿐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성이 감독관의 역할을 잠깐 잊은 순간에 개인은 외부와의 연결고리가 끊겼음을 인지하고 강인한 바깥 세상에 마주한 나약한 본인을 직시하게 됩니다. 이성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 놓고 감정을 충실하게 느낄 수 있다면 이런 무기력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나름의 답을 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화 <밀양>은 슬픔, 좌절, 분노에 허우적거리는 한 인물의 심정을 심층적으로, 그리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이의 유괴를 소재로 삼은 유명한 영화를 떠올려 보면, 할리우드의 <테이큰>, <맨 온 파이어>와 같은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 두 영화는 유괴의 발생과 해소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루며,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로 범인을 추적하는 주인공의 원맨쇼로 구성된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주인공이 인면수심의 악당을 처단하는 권선징악적 플롯에서는 악당의 폭력적 행위와 더불어 주인공의 잔혹함마저도 관객을 흥분시키는 시각적 볼거리에 불과합니다. <밀양>은 그와 달리 유괴 사건의 발단과 마무리를 단조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괴 사건의 자극적인 잔혹성을 강조하는 그 어떤 요소도 모두 거세해 버렸는데, 사라진 아들 준이 납치되는 순간은 보여주지도 않고, 이신애(전도연 扮)가 강둑에서 아들을 발견하는 장면이나 화장터에서 보여주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에서조차 범행의 잔혹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대신 감정의 혼란스러움, 후회와 더불어 보여주는 피학적인 순간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일상적인데, 신애가 간장이 끊어질 듯 울어도, 세상을 잃은 듯 공허해도 이해하지 못 한다는 듯 지나다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강인한 세상에 압도되는, 나아가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는 그녀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애가 서울에서 밀양으로 들어와 다시 새 삶을 꾸리려 하는 도피적 심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밀양으로 내려왔냐는 질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애아빠가 밀양에서 사는 게 소원이랬더라는 신애의 말. 가족의 상실을 겪어 본 신애는 사실은 세상의 불합리와 불가피성에 데여 밀양으로 피신을 한 것입니다. 개인적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은 공동체로부터의 진정한 소속감과 유대감으로 그 위기를 능히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유대감이란 일방적이거나 강압적인 것이 아니고, 피학적이거나 가학적이지도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개인이 어떤 공동체에 자아를 잃지 않는 건전한 소속감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애는 개인주의적인 현대 문명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신애가 시골의 배타적 공동체의식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신애가 가지고 있는 도시의 개인주의적 속성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개인주의는 폭력에 맞서기 위한 민주적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지키지 못한 개인들에게는 또다른 독재와도 같은데, 이는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모두 분해하여 무력한 개인과 강인한 세상을 서로 맞대면시키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사망을 혼자의 힘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던 신애는 도피를 선택합니다. 남편이 원해 마지않았다는 합리화까지 시키면서 말입니다. 정황상 남편은 불륜을 저지른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남편을 비호하는 신애의 태도도 합리화하는 행동의 일부라고 볼 수 있겠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신애에게 닥친 사건은 사랑하는 아들의 존재만을 앗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이 유괴 사건은 그녀의 생활의 근간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던 합리화가 무너지게 된 사건으로 풀이됩니다. 밀양으로 이사를 온 것이 남편이 그렇게도 원했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없었던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음을 신애는 깨닫습니다.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고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채 하던 그녀의 속임수는 사실은 도시 여자의 콧대를 세우기 위한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새로운 땅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신애가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이자 합리화였습니다. 그러나 신애의 노력이 결국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앗아가는데에 다다르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녀의 행동의 근간에 있던 거짓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유대감, 생의 의미, 자아의 존재 목표 모두를 한꺼번에 상실해버린 신애는 남편의 죽음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다른 차원의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제 후회를 할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철저한 개인이 되어 압도당한 신애는 심지어 아들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살인범에게도 적극적인 항의와 분노를 뿜기는 커녕 그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극도의 무력감과 탈력감에 빠진 신애는 과거 무시했던 약사 아주머니의 조언이 생각난 듯 교회로 향하게 됩니다. 

 

<밀양>에서는 교회라는 소재를 깊게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 기독교계에서 당시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영화가 다루려는 중심 소재에 교회가 포함된다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영화적 장치에 더 가까운 주변 소재이고, 교회를 비판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은 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신애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그녀의 또다른 도피처가 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남편의 상실을 견디지 못해 서울에서 밀양으로 내몰린 것처럼, 이전에 없던 고독에 빠진 그녀가 생존을 위해 도피한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가혹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고독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무인도에 떨어지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희망을 가지고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존재가 따로 떨어져 소외되어 있다면 그가 설령 대도시에 있더라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고독을 겪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취하는 여러 전략이 있는데, 이전에 신애가 보여 줬던 합리화가 그 하나라면 교회를 다니고 나서부터 더 노골적으로 보이는 피학적 태도도 그 중 하나입니다. 피학적 성향에 대해 추가설명하자면, 일반적 상식과는 달리 피학적 태도는 가학적 태도와 서로 상호의존적이며 동시성이 있습니다. 이는 피학과 가학은 분리된 자아의 재연결이라는 심리적 이유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지배당하려고 하는 것은 나약한 자아의 자유를 더욱 강인한 외부의 존재로 대체하는 것으로 불안을 감추려는 것이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것은 자아의 확장을 통해 외부에 맞설 더 강한 자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신애가 생전 믿지 않던 교회에 자아를 완전히 투항하는 것은 피학적 태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피학적 태도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신애가 교도소를 찾아가 유괴범을 대면하는 씬입니다. 유괴범이 차라리 적반하장의 태도로 욕을 하며 나가서 꼭 복수할 것이라고 신애를 협박했더라면 오히려 더 좋을 뻔 했습니다. 스스로를 완전히 내려놓으려 했건만, 그리하여 완만한 죽음을 맞이하려 했건만 신의 사랑은 그것조차 윤허하지 않는 듯 합니다. 유괴범은 신애의 자기파괴욕구를 충족시켜주기는 커녕 완전히 와해시켜버립니다. 이 씬은 배우 전도연씨의 뛰어난 연기에 더욱 힘입어 관객에게 소름이 끼치는 불안감을 느끼게 해 준 엄청난 씬이었네요. 이 때를 기점으로 신애의 피학적 태도는 더 심화되며 그와 더불어 숨어 있던 가학적 태도, 그리고 파괴적 욕망까지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끝내는 이것이 정신적 병증으로까지 이어져 신애는 정신병원에서 수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마지막으로는 거울 한 켠에 있는 아들의 사진조차 무심한듯, 체념한듯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아가 제거된 자동인형 같습니다.

 

신애가 겪은 일련의 시련은 불가항력적인 요소 때문에 더 비극적입니다. 바꿔 말하면, 어떤 부분이 어색하다고 지적할 수도 없을 만큼 신애의 위험 회피 프로토콜은 누구나 취할 법 한 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누구든 그 정도로 힘든 시련이 있다면 살던 곳을 떠나 살거나 종교에 의탁하게 될 것이라 생각할 법 합니다. 신애에게 닥친 일은 가능성이 정말로 희박하지만 한편으론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인데, 그에 맞서는 개인은 누구든 신애처럼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이제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 원초적인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랑과 일의 힘이 필요하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자아를 부수는 피학적이거나 가학적인 관계가 아닌 지극히 건전하고 건설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곧 사랑이며, 세상에 압도되지 않고 자아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의 개념에서 벗어난 자발적인 의미에서의 일이라고 말이죠.

 

자아와 자아의 바람직한 연결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모방이나 학습이 되는 경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개인이 온전히 창조해 내는 감정은 실제로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서비스업 직종에 있는 사람이라면 근무 중에 얻는 감정은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크겠죠. 어떤 감정은 잘 학습되어 있어서 간소화된 신호만 입력이 되도 특정 감정이 나오기도 합니다. 영화산업에 빗대자면 소위 말하는 신파가 여기에 해당이 될 것 같네요. 반면 풍부하면서 건설적인 특징이 있는 자발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자아와 외부 세계와의 적극적인 관계가 있을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취미에 골똘히 몰두하는 순간 느끼는 성취와 희열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순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자발적인 감정입니다. 순정남 김종찬(송강호 扮)의 산뜻한 손길이 미처 신애에게 닿지 않은 것은 신애가 절조 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타인과의 유대를 잃어버려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없었던 신애의 모습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비극이 아닌가 합니다.